임희일(林希逸)의 《장자구의(莊子鬅意)》 번역

임희일(林希逸)의 《장자구의(莊子口義)》 내편 제2편 〈제물론〉 4

gwonju95 2026. 6. 23. 13:19

一受其成形,不亡以待盡。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荼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

한번 완성된 몸 형태를 받으면, 사라지지 않고 (그 수명이) 다하기를 기다린다. 사물과 더불어 서로 칼날을 부딪치고 마찰하면서, 살아가는 행동이 모두 달리는 말과 같아서 이를 멈출 수 없으니, 또한 슬프지 않은가! 평생을 수고롭게 일하면서도 그 성공을 보지 못하고, 피로에 지쳐 고달프면서도 자기가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니, 어찌 애처롭지 않은가! 사람들이 이를 두고 죽지 않았다고 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형체가 변해가고 마음도 그와 함께 그렇게 변해가니, 어찌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삶이란 진실로 이처럼 어리석고 아득한 것인가? 나만 홀로 어리석고, 다른 사람 중에는 어리석지 않은 자가 또 있는 것인가?

 

大抵人之形體,非我自有,必有所受者。既受此形於造物,則造物與我相守不亡,以待此形之歸盡而後已。而人不能一順乎造物,乃爲外物所汨,與之或逆或順,以此而行,盡其一生,如駒過隙,不能以一息自寧,故曰行盡如馳,而莫之能止。相刃,相逆也。相靡,相隨汨没之意。終身役役,言自苦也。不見其成功,言無益也。採得百花成蜜後,不知辛苦爲誰甜,即此意也。荼然疲役,又形容其役役勞苦之狀。不知其所歸,不知何日可休歇也。人生之自勞如此,壽雖百年亦何益?故曰不死奚益。其形化者,從衰得白,從白得老也。年彌高而德彌卲,則是形化而心不化,在我既無見識,徒以心爲形役,形衰而心亦疲矣,故曰其心與之然,芒芒然無見識也。彼愚惑之人,亦當回首自思曰:凡人之生,其胸中本若是昧然無見乎?豈我獨昧而人亦有不昧者?此意蓋謂天生蒸民,有物有則,民之秉彝,好是懿德。天理未嘗不明,汝以人欲自昏,故至於此。知道之人,豈如此芒昧乎?此所謂金篦刮膜,要汝開眼也。

대체로 사람의 형체는 내가 본래 소유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것을 받은 바가 있다. 이미 이 형체를 조물주에게서 받았으니, 조물주가 나와 함께 서로 지키며 사라지지 않다가 이 형체가 돌아가고 다한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조물주에게 한결같이 따르지 못하고, 도리어 외물에 빠져들고 휩쓸려(汨) 조물주를 혹 거스르기도 하고 따르기도 한다. 이로써 행하여 일생을 다하니, 마치 준마가 문틈을 지나가는 것 같아서 단 한 순간도 스스로 편안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살아가는 행동이 모두 달리는 것과 같아서 이를 멈출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상인(相刃)'은 서로 거스르는 것(相逆)이고. '상미(相靡)'는 서로를 따라 빠져들고 침몰한다(汨没)는 뜻이다. '종신역역'은 스스로 고생함을 말하고, '불견기성공'은 유익함이 없음을 말하니, "온갖 꽃을 따다가 꿀을 만들었건만, 그 고생이 누구를 위한 달콤함인지 모르겠구나"라는 시 구절이 바로 이러한 뜻이다. '도연피역(荼然疲役)'은 또한 부림을 당해 수고롭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부지기소귀( 不知其所歸 )'는 어느 날에야 쉴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인생이 스스로 수고로움이 이와 같으니, 수명이 비록 백 년이라 한들 또한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죽지 않은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그 형체가 화한다(其形化者)'는 것은 쇠약함으로부터 흰머리가 되고, 흰머리로부터 늙어 감을 뜻한다. 나이가 더 높아질수록 덕이 더 아름다워진다면 이는 형체는 변하되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나에게 이미 식견이 없어서 헛되이 마음이 형체의 부림을 받게 되면 형체가 쇠할 때 마음 또한 피로해진다. 그러므로 '그 마음도 그와 함께 그렇게 변해간다'고 하니, 아득하여 식식이 는 것이다. 저 어리석고 미혹된 사람들도 마땅히 고개를 돌려 스스로 생각하기를 "무릇 사람의 삶이란 그 가슴속이 본래 이처럼 어두워 아무런 소견이 없는 것인가? 어찌 나만 홀로 어둡고 다른 사람 중에는 어둡지 않은 이가 있는 것인가?"라고 하는 법이다. 이는 대개 '하늘이 수많은 백성을 내시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고, 백성이 떳떳한 도리를 지니니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  천리(하늘의 이치)가 밝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네가 인욕(인간의 욕망)으로써 스스로 어둡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라는 뜻이다. 도를 아는 사람이 어찌 이처럼 아득하고 어둡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금비( 金篦 )로 눈의 막을 긁어내어 너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이다.

 

*쇠빗으로...한다 : 사람의 사고를 각성시키는 것을 비유적으로 쓴 말이다. 금비는 고대에 눈병을 치료할 때 쓰던 금속 기구의 일종이다. 

 

이 글은 인간이 태어나 형체를 부여받은 뒤 외물과 욕망에 끌려 평생을 분주히 살아가지만, 정작 참된 성취와 귀착점을 알지 못하는 삶의 비애를 말하고 있습니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인간의 몸은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라 조물주에게서 받은 것이며, 삶은 그 형체가 다할 때까지 이어진다.
  • 그러나 사람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지 못하고 외물과 욕망에 휩쓸려 끊임없이 다투고 마찰한다.
  • 인생은 달리는 말처럼 빠르게 흘러가 멈출 수 없고, 사람은 평생 수고하지만 참된 성공이나 의미를 보지 못한다.
  • 몸이 늙고 쇠할 뿐 아니라, 식견이 없으면 마음까지 몸과 함께 지치고 어두워진다.
  • 이런 상태를 “살아 있어도 무슨 유익이 있는가”라고 탄식하며, 인간 삶의 큰 슬픔으로 본다.
  • 다만 이는 인간이 본래 어두워서가 아니라, 하늘의 이치가 본래 밝은데도 인간의 욕망이 스스로를 가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따라서 도를 아는 사람은 이런 미혹에서 벗어나며, 글의 목적은 마치 눈의 막을 걷어내듯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데 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 글은 인간이 욕망과 외물에 휘둘려 참된 이치를 잃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현실을 슬퍼하며, 마음의 어둠을 걷고 도를 깨달아야 함을 말하는 글입니다.